"커헉, 큭… 크으…"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쿵, 하는 충돌음도 이어졌다. 일찍부터 자러 간다던 델론즈가 있는 위층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멜키르는 보고 있던 흑마법서를 덮고 소리가 난 곳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대장?"
숨을 몰아쉬며 바닥을 기는 델론즈의 형상은 항상 장식처럼 진열되어 있던 단도로 손을 뻗고 있었다. 갑주를 입고 있지 않은 평상시에도 말끔하게 잠겨 있던 무늬 없는 흰 셔츠는 다 풀어 헤쳐져 있었다. 긴박해 보이는 상황이었지만 멜키르는 델론즈가 무얼 하려나 싶어 잠시 그대로 보고 있었다. 단도를 몇 번 고쳐 잡는 과정에서 델론즈는 피를 토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붙잡고 상태를 살펴보아야 하는가, 싶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보아 온 델론즈라면 이러한 상황이 발생한 것도 무언가 의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다. 멜키르가 보고 있다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한 듯 델론즈는 숨을 고르고 마침내 단도를 바로 쥐었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의 심장부위로 내리꽂았다.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델론즈가 자신의 심장에 단도를 꽂아 넣는 것보다 멜키르가 달려든 게 더 빨랐다. 피지컬 적인 능력 면에서 델론즈에 못 미치는 마법사 멜키르가, 간신히긴 했지만 제 마검으로 델론즈의 단도를 튕겨낸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튕겨나간 단도는 그대로 벽면에 부딪혀 다시 튕겨 나왔고, 튕겨 나온 자리에서 몇 바퀴나 돌았다.
"무…슨 짓이냐… 멜키…르!"
"아. 나도 모르게."
델론즈는 잔망스럽게도 양 손을 펼치며 으쓱, 해 보이는 멜키르를 노려보다가 또 쿨럭이며 피를 토했다. 멜키르는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도와줄까, 대장?"
"쿨럭… 연…희… 불러…와…"
"꼬맹이는 어제부터 안 보이는데?"
델론즈는 죽는다. 1500년도 넘게 살아온 인간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목숨줄을 이어왔을 리가 없었다. 파괴신을 섬기는 드래곤- 파멸의 눈동자와 '파괴신 강림'을 조건으로 영생을 약속 받았다. 이것은 그 부작용이었다.
델론즈는 여기서 죽는다. 죽기 전에, 심장에 동화된 파괴의 조각과 기억을 뽑아내고, 완전히 숨이 끊어지면 다시 그 힘과 기억을 받아들여 살아날 것이다.
매번 수명이 다할 때마다 델론즈는 자신 안의 파괴의 조각을 뽑아내기 위해, 파괴의 조각이 깃든 단도로 제 심장을 찔러 자살했고, 생명활동을 멈춘 뒤 다시 제 몸에 기생해 오는 파괴의 조각과 자신의 기억의 편린들을 받아들여 살아났다.
"지금껏 이런 무식한 방법으로 삶을 영위해 왔던 거군."
"그만…둬… 헉,"
멜키르는 비릿하게 웃으며 피투성이가 된 델론즈를 바닥에 억지로 눕혔다.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진 양 손은 멜키르의 마법에 의해 속박 당했다. 델론즈는 멜키르를 제지하고자 했지만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제 기운을 낼 수 없었다.
'허약한 마법사 따위가…!'
속으로 욕지기를 뱉어내고 있는 델론즈의 심장 부근의 맨살에 멜키르의 손이 닿았다. 피부로, 멜키르의 어두운 마력이 느껴졌다. 지금, 심장을 찌르지 않으면 안 된다. 젠장, 젠장!
"저 단도가 매개인 거겠지, 대장?"
델론즈의 가슴에 닿은 멜키르의 손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일렁였다. 심장 부근을 점점 더 움켜쥐듯, 멜키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델론즈의 몸이 발작하듯이 경련하기 시작했고, 멜키르가 점점 손을 떼자 델론즈의 몸으로부터 보랏빛 도는 파편들이 빨려나왔다. 파괴의 파편들은 델론즈의 힘이기도 했고, 이미 죽었어야 했던 육체의 생명 할동의 기저이기도 했다.
"매개가 되는, '파괴신의 조각'은 나에게도 깃들어 있지. 안심해, 대장. 대장 분을 내가 먹어버리진 않을 테니."
멜키르를 노려보는 채로, 델론즈의 숨이 끊어졌다. 델론즈에게 깃들어 있던 파괴의 파편들을 자신의 마력으로 묶어둔 멜키르는 다른 한쪽 손을 들어 숨이 끊어진 델론즈의 두 눈을 감겼다.
'먹음직스러운 힘인데…'
멜키르는 제 한 손에 묶여있는 파괴의 파편들을 바라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델론즈에게 깃들어 있던 파괴의 파편들이다. 자신이 집어 삼킨다면 델론즈를 뛰어넘는 것은 물론 세상도 제 멋대로 주무를 수 있을 것이었다. 탐이 났다. 하지만 그는 아직 델론즈에게 흥미가 남아 있었다.
"맛만 보고 돌려줄게, 델론즈."
멜키르의 마력이 스물스물 흘러나와 델론즈가 가지고 있던 파괴의 파편들을 유린했다. 파편에 달라붙어 있던 달콤한 어둠의 내음은 멜키르의 마력과 궁합이 잘 맞는지, 이내 섞이곤 했다. 파편 여기저기에는 뜨문뜨문 델론즈의 옛 기억들도 있었다. 어딘가의 공주…, 그리고 그녀의 기사. 델론즈의 옛 기억의 서사는 전부, 그 기사의 시점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 스놀드.
공주로 보이는 여인이 어여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 이름을 부르자, 기사의 마음이 간지럽게 요동쳤다. 그것은 일순 멜키르가, 자신의 심장이 떨린다고 착각할 정도로 진한 감정이었다. 어떤 사이일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정도였다.
멜키르는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스놀드라는 이름의 기사가 공주의 부고를 전해 듣고 오열하는 부분까지 빠르게 지나쳐 갔다. 공주는 암살당했다. 어리숙한 스놀드는 홀로 복수라도 할 작정이었는지 공주를 암살한 일당에 대해 조사하다가, 공주와 같은 운명을 맞았다. 심장이 꿰뚫린 채로, 공주의 앞에서 처음 기사서약을 하던 때를 떠올리며 기사의 의식은 점점 사라져 갔다.
스놀드 블랙 사이드.
서사는 스놀드의 시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 기억을 훔쳐보는 멜키르는 스놀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스놀드와 함께했던 검 한 자루는 익숙한 모습이었다. 파괴의 힘을 완전히 개방한 델론즈가 사용하는 쌍검의 모습과 똑같이 생긴 검이었다. '지옥쌍검'이라 불리는 그 검은 델론즈의 옛 기억에서 비롯된 물건이었던 모양이다.
멜키르는 파편을 유린하던 마력의 흐름을 멈추고, 눈 감은 채인 델론즈의 사체를 응시했다. 멜키르는 델론즈의 광기에 반해 있었다. 멜키르가 델론즈를 따르기 시작했던 계기는 그 광기 때문이었다. 헌데 그가 지금처럼 미치광이가 된 이유가 겨우 사랑 때문이라니, 멜키르는 조금 실망스런 기분이 들었다.
"사랑꾼이었군, 델론즈."
아니, 스놀드.
멜키르는 붙잡아 두었던 파괴의 파편을 들고, 이대로 흡수해 버릴까 잠시 생각하다가, 최종적으로는 델론즈에게 돌려주기 위해 다시 한 번 델론즈의 심장 부근에 손을 뻗었다. 파편들을 붙잡고 있던 마력을 해제하자 당연하다는 듯이 그것들은 델론즈에게 스며들었고, 사체였던 그것은 서서히 체온과 혈색을 되찾아 갔다. 영원한 삶을 영위하는 조건이 죽음이라니, 델론즈가 세븐나이츠로서 다스리던 영지에 채이도록 많은 언데드와 같지 않은가.
*****
델론즈가 깨어나자마자 멜키르의 목덜미에 낫을 들이댄 것은 멜키르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멜키르의 앞에서 죽기 전 살벌하게 노려보던 그것과 같은 눈빛이었다.
"좋은 꿈이라도 꿨나 봐, 대장?"
"…네놈."
"날 죽일 건가, 델론즈? 당신은 내가 필요할 텐데."
델론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확실히 멜키르는 델론즈의 계획에 있어서 꼭 필요한 존재이기는 했다. 흑마법에 대한 그의 탐구욕과 방대한 마법적 지식은 델론즈로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델론즈가 자신이 생을 어떻게 이어나가는지 따로 알려준 적이 없음에도 멜키르는 스스로 연구한 결과인지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새였다. 델론즈가 지금 살아있는 것은 멜키르가 그를 죽일 의사가 없었던 것이고, 그의 대처가 적절했음을 의미했다. 확실히, 세븐나이츠나 사황들처럼 쓰다 버릴 장기 말은 아니었다.
"기고만장하군."
"칭찬으로 듣지."
델론즈의 낫은 멜키르의 목덜미에 작은 생채기를 남기고 떨어져 나갔다. 멜키르는 자신의 왼손을 들어 생채기가 난 목덜미를 감쌌다. 신경전은 끝나지 않았다. 델론즈는 집요한 눈으로 멜키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멜키르 역시 흔들림 없이, 대수롭지 않다는 눈빛으로 델론즈를 마주 바라보았다. 똑똑한 사람이니, 이 짧은 순간에도 머리를 굴려 자신에 대한 처우를 고민하고 있으리라고 멜키르는 생각했다. 또한, 자신의 목덜미에서 낫을 치운 순간 이미 죽인다는 선택지는 배제되었음을 알았다.
"당분간 두고 보겠다, 멜키르."
"좋으실 대로."
멜키르는 델론즈에게 대꾸하며,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1500년이나 살아온 이 작자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과 자신에 대한 처우를 어떻게 결정했을지, 그리고 앞으로 자신을 어떻게 이용하려 들 것인지… 그것은 무척이나 흥미를 돋우는 테마였다. 세상 모든 흑마법을 익히고, 새로운 흑마법을 만들어내는 경지까지 왔음에도 채워지지 않았던 무언가의 욕구를 델론즈가 채워줄 수 있을지, 멜키르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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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키르x델론즈
전혀 계획없이 과제하기 싫어서 쓴 글이라 中이나 下편이 올라올지는 파괴신도 모름
공식에 게시되었다가 삭제되었다고 전해지는 설정을 참고해서 쓴 내용들이 있어서 가독성이 떨어질지도 모름
* 델론즈가 생을 이어나가는 방식은 지어낸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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